풍족한 학습의 시대는 갔습니다.
수십 년 전 산업 시대에는 경로가 가시적이었습니다. 공부 마치면 어딘가 취직하고, 신입에게 큰 기대 없이 작은 일부터 시킵니다. 시간 지나면 업무 기술과 도메인 지식이 늘면서 일잘러가 되어갑니다. 그렇게 승진하며 정년퇴직까지 갑니다. 세월에 따라 지식과 스킬이 늘고, 기대도 경력에 비례합니다. 실패할 기회와 학습할 시간이 그래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공부 마치면 어딘가 취직하고'부터 망가진 고리가 되고 있습니다.
업무 경험은 자가증식을 합니다.
일을 잘해내면 더 어려운 일을 맡게 되고, 더 깊어진 경험을 얻게 되지요. 예전엔 찬찬히 성과내며 계발할 여유가 있었다면, 지금은 즉시전력을 찾고, 빨리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되어가니 신입에게 더 가혹해졌어요.
그래서 암묵지는 빈익빈이 됩니다.
일을 해봐야 암묵지가 생기는데, 암묵지가 없으니 일을 맡지 못합니다. 못 맡으니 또 못 쌓이고요. 신입직원이 AI의 기능은 잘 쓸지라도, AI로 어떤 결과를 내야할지, 뭘 제약하고, 뭘 검증할지는 업무 경험에서 나오는 암묵지로 정해집니다. AI를 사용해 소통해도, 누구에게 말해야할지, 어떤 톤으로, 어느 시점에 말해야할지가 성과에 큰 영향을 줍니다. 하지만 업무 관련 소통은 조직에서 일해보지 않았다면 미세한 결을 알기 어렵습니다.
"복리와 복잡계를 이해해라."
제 딸 아들에게 그나마 업무 경험을 빠르고 깊게 할 핵심으로 알려준 방법입니다. 미안하게도 제 세대보다 기회가 실낱같은 MZ에겐 이게 빨리 따라잡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복리는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마법입니다.
업무 경험 관련 복리란 무엇일까요. 빠른 착수와 재투자입니다. 어떤 경험이라도 지금 당장 손에 쥘 방법을 찾으면 복리 효과를 더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오래 굴리려면 빠른 착수와 꾸준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경험이 내일의 원금이 되어야 하지요. 오늘의 경험이 내일의 일과 연관성이 없다면 재투자가 아닌 단리구조가 됩니다. 그래서 최대한 오늘 경험이 내일 일에 투입되어야 합니다. 더 잘하는 방법을 정리해두고, 실수를 줄이거나, 더 통합적으로 보는 식으로요. 여기에도 회고가 핵심이 됩니다. 업무 관련해서는 감정 회고에 더해, 프로젝트 회고를 곁들이면 효과가 큽니다. 그리고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업무가 연속성을 갖는게 중요합니다. 조직 내에서, 일을 고를 수 있는 옵션이 많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의도는 있어야 합니다.
둘째, 복잡계는 다루기 어렵지만 그만한 보상이 있습니다.
데이비드 엡스타인의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에는 두 가지 학습환경이 나옵니다. 친절한 학습 환경은 결과가 바로 나오고, 피드백도 명료하여 왜 잘했는지 왜 못했는지 파악이 쉽습니다. 자연히 학습도 쉽지요. 반면 사악한 학습 환경은 결과가 시차를 두고 나오거나, 여러 요소를 거쳐 나옵니다. 잘해도 왜 잘한건지, 어느 것 때문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안타깝게도 고급 업무 경험은 사악한 학습입니다. VUCA라고 하는 마왕급 난해함이 도사리고 있지요. 환경이 매번 미세하게 달라지는 변동성, 같은 방법이라도 전엔 됐는데 이번엔 안되는 불확실성, 사람 손을 타면서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복잡계성, 결과가 다 된건지 더 해야하는지, 심지어 성공인지 실패인지도 알기 어려운 모호함이 일을 어렵게 만듭니다.
사악한 환경에서 잘 배울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친절한 환경 만들기입니다. 복잡도가 낮은 쉬운 일부터 빠르게 많이 해본다든지, 전문성 있는 선배나 전문가의 판정이나 조언을 가까이할 방법을 찾아둔다든지요.
다른 하나는 나눠서 실행하기입니다.
일을 덩어리로 나누어 단순화된 연속의 일로 만든 후, 빠르게 실행하고 빠르게 실패하는거죠. 실패인지 성공인지, 이 결과가 나온 요인은 뭐였을지 따져봅니다. 처음엔 짐작밖에 못해도, 몇 차례 경험하면 시도와 결과의 인과관계가 조금씩 보입니다. 물론 회고는 두 방법 모두 필수이고요.
그래서, 두려움 없는 조직이 일도 잘 합니다.
에이미 에드먼슨 연구에 따르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조직이 성과도 높고 치명적 실수가 적다고 합니다. 매우 사악한 학습 환경인 조종실, 병원, 기업 등에서 실수를 드러내는 두려움, 실패 시 조직과 팀에서 평가당하고 배척당할 걱정을 덜어주면 조직의 혁신능력과 실행 능력이 높아집니다. 조직의 두려움을 줄이려할 때, 종종 쓰는 방법이 '실패 장려'일 정도로 실패는 유용합니다. 그래서 개인도 실패를 두려움이 아니라 학습으로 보는 관점 전환이 업무 경험의 핵심입니다. 진짜 실패는 실패에서 못배우는 것이고, 쇠락의 지름길은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안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꼰대같은 결론밖에 생각이 안나더군요.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월급이 얼마인지, 회사가 어디있는지보다, 내가 많은 경험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보고, 다양한 일을 직접 해볼 수 있는 곳으로 향하는게, 긴 인생 두고 볼 때 가장 효과적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저와의 대화 이후 딸과 아들은 둘 다 일복은 터지지만 많이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나마 두 친구는 이제라도 막차 같은 경험의 기회를 얻어 다행인데, 몇 년 후 사회에 나온다면 어땠을까, 아득한 상상을 합니다.
비단 초년생뿐일까요.
이미 직업이 있고 자리를 구축한 대다수 직장인도 경험의 지도 차원에서, 제가 드린 업무 경험이라는 렌즈로 곰곰 따져 보면 도움 될 겁니다. 내가 일하는 방식이 재투자가 이뤄지는 복리 효과를 누리고 있는지, 매번 일의 결과에서 잘 배우고 있는지, 사악한 학습환경의 결과를 친절하다고 오인하지 않는지, 아니면 부담스러워서 친절한 환경만 찾아다니고 있지는 않은지, 실패를 학습의 기회로 삼는지 회피하기만 하는지요. 이제 우리가 가진 지식은 빠르게 범용화되지만, 업무 경험 관련해서는 암묵지가 갑옷이 되어줄겁니다. 제가 드린 경험의 지도 여섯 칸은 그나마 인간의 몫으로 남겨질 테고요.
사실, 업무 경험은 워낙 넓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경험의 가속화를 이야기하긴 쉽지 않아 간결성을 유지하며 최대한 설명하려 노력했는데 이번 글은 제게 도전이었습니다. 수차례 고치고 덜어내어도 글이 무거워지니 제 마음도 가볍지 않습니다. 언제쯤 유쾌하고 간결하게 깨달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수십 번 퇴고의 경험이 조금이라도 제 글을 낫게 하리라 믿고 실패도 받아들이기로 하고 편지를 보냅니다.
어째, 이번 편 좀 도움이 되셨나요?
말이 어렵거나 설명이 부족하면 물어봐 주시겠어요. 그리고 다른 업무 경험의 핵심 요소를 알고 계시면 제게도 알려주세요. 무엇보다, 이 내용이 도움 될 주변 분이 생각나면 소개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항상, 시간내어 제 편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엔 공명 경험 이야기로 뵙겠습니다.
P.S. 편지 형식을 조금 바꿔 볼까 합니다.
한 편을 두 번에 나눠 보내고, 두 번째 편지에는 앞 편지에 주신 답장과 제 답을 함께 싣는 방식입니다. 어떠실지 하나만 눌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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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에 나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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