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경험에서 시작할게요. 경험 지도의 첫 칸이자, 모든 경험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바라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마음의 모양을 잡습니다. 정체성 경험은 개인의 고유 서사라서, 개인마다 조금씩 다른 주체성(책임감), 취향(세계관), 공감의 조합으로 이뤄집니다.
정체성은 인간 뇌의 특징입니다. 연약한 몸의 연장선에 얹혀있기 때문입니다. 보상받는 육신의 기쁨과 절멸하는 육신의 두려움이라는 운명적 제약과 유한성에 기반한 지능입니다. 인간의 뇌는 살아온 육신의 경험에 따라 주체성, 취향, 공감의 고유한 조합을 갖고, 한 사람의 개성과 품성을 구성합니다. 그래서 주체성은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관장합니다. 취향은 가중치로 기억된 선호의 집합입니다. 공감은 공동의 취약성(shared vulnerability)에 대한 이해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세가지 점에서 AI 에 대비되는 쓸모를 갖게 된다 말씀 드렸습니다.
정체성 경험을 어떻게 자본으로 만들까요. 경험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공들여 추출해야 합니다. 선택이란 어떤 경험을 내게 먹일 것인지의 결심이고, 앞으로 레터에서 계속 다루겠습니다. 오늘은 추출 또는 증류를 이야기할게요.
제가 알고 있는 최고의 증류법은 감정회고입니다. 쉽지만 어렵고, 약해 보이지만 강력한 정체성 형성 방법입니다. 매일 스스로의 감정을 살피고 기록하면 되기 때문에 쉽지만, 스스로의 감정을 살펴보는게 불편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강철 같은 이성에 비해, 연약해 보이는 감정이지만, 제 모든 계단적 성장엔 감정의 회고가 있었고, 힘이 세다고 생각합니다.
독서 리뷰를 열심히 하게 된 계기가 기억납니다. 십수년전, 바로 얼마전 읽은 경영서적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였습니다.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고 대화를 시작했지만 막상 하나도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었습니다. 그저 몇가지 에피소드와 키워드 몇 마디 정도. 물론 지인과 대화라 별문제는 없었는데, 스스로 창피해서 그날 일기에 썼습니다. "책을 한눈으로 읽고 한눈으로 흘릴 바에는, 읽지를 마라.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건 겉표지와 종이 위 잉크를 사랑한거냐." 로 시작되는 독한 말들이 기억납니다. 그리고는 리뷰를 써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책을 읽은 후 내용을 다시 떠올려보고, 리뷰 문장으로 정리하다 보면 읽을 때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고, 기억도 좋아집니다. 지금도 독서 리뷰는 제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회고는 뇌의 작동 원리를 이용합니다. 뇌는 감정을 각인하고, 그 새겨진 감정이 성격에 영향 미치고, 바뀐 마음의 태도로 다음 할일이 바뀝니다. 그리고 그 바뀐 행동으로 새롭게 감정이 생기며 학습의 고리가 닫힙니다.
그래서 모두가 힘들어합니다. 정체성 형성의 재료가 되는 감정은 날것이면서 대체로 못생겼습니다. 보기 싫고 불편합니다. 정체성을 형성하려면 회고에서 감정을 주된 목적으로 다뤄야 합니다. 오만했다면 창피를 느끼고, 안일했다면 분해야 합니다. 이 당연한걸 못했던 내게 화가 나고, 예상대로 안 움직이는 바깥 세상에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가끔은 잘한 부분을 되새기며 기뻐해도 좋습니다. 중요했던 사건에 대한 내 감정을 생생히, 곰곰이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일기 같은 회고 시스템이 좋습니다. 매번 적어둔 감정은 무의식 중 다음 행동의 갈피가 되고, 의도적인 노력의 길잡이가 됩니다.
일기도, 무엇을 적느냐가 판가름합니다. 기계적 기록, 오늘 뭐했다 류의 일지는 훗날 기억을 되살리기에는 좋은 재료지만 거기서 그치기엔 아쉽습니다. 기왕하는 일일 회고가 줄 최고 선물을 놓치게 되죠. 감정은 개선의 계기라서 생생히 쓸수록 효과가 큽니다. 반면, 감정을 납작하게 누른 건조한 회고는 회고를 위한 회고에 머물 공산이 큽니다. 그러면 지속하기도 힘들어요. 회고의 번아웃이 오거나, 그저 효용을 못 느껴 시간 낭비처럼 느끼기 십상입니다.
실제로 어찌 하면 좋을까요? 당장 실천하기 좋은 방법은 마음에 드는 노트 하나 골라, 매일 한 문단 정도 감정 위주로 하루를 돌아보는 겁니다. 디지털이 편하면, 가벼운 전자 노트 앱에 한 문단 정도 매일 기록해도 됩니다. 글 쓰기 자체가 어렵게 느껴지는 분은 불릿 저널도 좋습니다. 업무, 개인 등 카테고리 별로 기분 상중하, 또는 희로애락 네 아이콘을 기록하고, 간단하게 한줄 적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하루 특정 순간 잡아서 깊이깊이 명상하듯, 거울보듯 감정을 돌아보고 그 감정을 소상히 적어두는데 까지 나가면 좋습니다. 꼭 안좋은 감정만 회고할 건 아니고, 기쁜 일 잘한 일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학습의 루프를 닫는 일이니까요. 배움에 작은 성공(small win)도 최고의 교재입니다.
보조로 줌아웃 회고도 권하고 싶어요. 주간, 월간, 분기, 연간의 회고는 여섯 칸 경험의 지도 모두에 도움이 됩니다. 더 배울 지식과 기술, 쌓아야 할 관계, 새로 들일 루틴과 덜어낼 습관 등은 줌아웃 할 때서야 보입니다. 저는 주간회고는 아래의 템플릿으로 합니다. 월간회고는 좀 재미나게 이달의 000를 12개 뽑습니다(그림. 2월 lookback). 분기회고는 더 독특한데 몸으로 합니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며칠 걸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인생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대신, 연간회고는 살짝 결을 달리합니다. 인생의 어느 과정에 있는지 큰 틀에서 바라보기 좋은 타이밍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일상으로 붙잡아 두기 힘듭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인, 신년계획 잘 세우는 법'이라는 글을 써둔게 있습니다.
주간회고 템플릿
W38 <한줄 요약>
• 누구와 대화했고, 무엇을 읽었으며, 어떤 일을 했나
• 무엇을 배우고, 어떤 감정을 느꼈나
• 다음주는 어떻게 보내고 싶나
• 이 주의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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