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 들이고 시간 때우기가 쉬워진 시대입니다. 넷플릭스 구독해 두면 종일 영화만 볼 수도 있고, 숏츠나 릴스 켜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우리에겐 권태를 피하는 101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디지털 컨텐츠는 정교하게 설계되어 도파민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자극하니, 진짜 기쁨과 가짜 기쁨을 혼동하며 기쁘다는 착각 속에 시간 위를 떠돕니다.
고약한 건, 삶을 납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삶을 살며 생기는 애환, 슬픔, 좌절, 기쁨, 환희, 고통이라는 진짜 경험에서 멀어질 방법이 많고, 컨텐츠 환경은 그걸 권장합니다. 그렇게 나이 먹을수록, 세상이 기대하는 세월의 값을 하기엔 점점 격차가 벌어집니다. 최신 아이돌 그룹의 근황을 잘 알고, 페이커의 최근 경기 하이라이트를 술술 읊을 수 있다는 게 현실에서 어떤 가치를 창조하기엔 빈약한 경험이니까요.
컨텐츠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우리는 가짜 경험에 휩싸여 살기 쉽습니다. 남 보기 그럴듯한 직장, 차, 사는 집, 천편일률의 취향과 취미, 가성비, 추천, 잇템 등 지향 없는 소비와 소일이 진짜 경험의 방해꾼입니다.
현장에서는 이 상황이 기이하게 표현됩니다. 좋은 일자리는 멀고, 긱 노동은 가깝습니다. 쥐꼬리 같은 사회안전망은 또 있으니, 가벼운 노동하면 굶지는 않고, 싼 컨텐츠가 있으니 지루하진 않습니다. 다만, 배고픔을 사탕으로 달래는 격입니다. 사람은 넘쳐 난다는데 뽑을 사람은 없고, 일하고 싶은데 뽑는다는 기업도 잘 없습니다. 경험이 진한 사람은 늘 조직에 모자라니까요.
이건 AI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AI는 흩어진 결함을 뭉치고, 병목의 위치를 옮길 뿐입니다. 대개 병목이 멈추는 지점은 사람입니다. 모든 직원은 무능함의 한계에 달할 때까지 승진한다는 피터의 법칙과 닮았습니다. 조직의 병목은 사람에 닿는 경계까지 밀려납니다.
그래서 경험입니다. 결국 중해지는 건 사람인데, 사람은 경험의 총합입니다. 최근에 듣기로, 미국에선 MBA 입학하기도 전에 취업 제의(job offer)가 온다고 합니다. 사람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이 모자란 시대로 접어듭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필요할까요? AI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만이 조직에 필요하고, 앞으로도 살아남겠지요. 저는 세가지 측면에서 봅니다.
• 주도적이고 책임을 지느냐 • 연민이 있고 사람 마음을 이해하느냐 • 취향(taste), 정의감, 세계관이 있느냐
셋은 AI가 설계적으로 결핍된 부분입니다. LLM 기반의 AI 에이전트는 실행의 주체가 될 수 없으므로 주도적일 수 없고 책임도 질 수 없습니다. 또, 감정을 읽고 이해하는 척 말할 수 있지만, 고정된 품성이 없으니 진심도 없습니다. 취향으로 가면 더 엷습니다. 호불호, 혐오, 미적 선호가 없으니 세계관이 없고, 어떤 관념에 대한 편향과 애착이 없습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지능과 달리 진화했습니다. 육화된 고통과 쾌락이 없고 개별적 성장의 이력이 없습니다. AI는 집합적이고 평균적인 개연성의 범위에 존재합니다. 이건 기술이 발전한다고 쉽게 바뀔 부분이 아닙니다.
책임, 공감, 세계관은 경험자본입니다. 단지 인생 살다 마주친 경험이 아니라, 경험을 증류해 자신 안에 모아둔 진액이죠. 그게 책임감과 죄책감, 공감과 설득력, 그리고 미감과 호오 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단, '그건 사람이라면 다 갖고 있는 것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점입니다. 경험상 셋 중 둘 이상은 탁월해야 하고, 그런 사람은 앞으로도 각광받게 될 겁니다.
경험은 흔하되 경험자본은 귀합니다. 농사를 짓고 잉여가 축적되고 식량이 병목인 시대를 지났습니다. 동력을 만들고 기계가 돌며 사람 숫자가 병목인 시대를 넘겼습니다. 자본주의와 상법, 금융이 발달해서 돈이 병목이 되는 시대를 지나왔습니다. 프롬프트 한방에 실행되는 코드가 툭 떨어지니, 기술이 해자가 되는 시대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결국 병목은 사람에 걸리고, 경험자본 결핍의 시대로 넘어가리라고 보입니다.
경험자본은 단지 시간의 함수가 아닙니다. 고통과 쾌락을 주의 깊게 투자해 나온 수익(return)을 자본으로 전환해야 얻어집니다. 반면 앞서 말했듯 질 좋은 경험 자체가 어려워진 요즘입니다. OTT, 게임 등 값싸고 쉬운 소일거리(time killer)가 넘쳐납니다. 일이 없으니 일을 통해 도메인 지식을 쌓을 기회조차 희소합니다. 돈은 빌릴 수 있는데 경험은 빌리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돈은 싸고 경험자본은 비쌉니다.
앞으로 이 경험자본을 어떻게 축적할지 그 지도를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